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형/존폐 논란 (문단 편집) ===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다는 사람의 거부감 === >선고를 내린 사람이 직접 검을 휘둘러야 한단다. 만약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야 한다면 그 자의 눈을 쳐다보고 유언을 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 만약 차마 그러지 못한다면 그 자는 죽일 자격이 없는 건지도 모르지. >---- >- <[[얼음과 불의 노래]]>의 [[에다드 스타크]] 아무리 범죄자들이 극악무도한 짓을 했다 해도 한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에 대한 거부감으로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죽을 짓을 한 범죄자라 해도 그 범죄자의 목숨을 앗아가야 하는 사형 집행인은 또 뭔 죄란 말인가. 이것은 사형 집행인들에게 또 하나의 폭력이 되는 것이다.[* 사형제에서 토론하면 제일 나오지 않는 것이 바로 누가 사형을 집행할 것이냐는 것이다. 만약 역설적이게도 사형 집행인이 사이코패스와 같은 사람이라면 사형을 집행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 전쟁터에서 살기 위해 사람을 죽여도 [[PTSD|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에 걸리는데, 사형 집행을 하는 것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고는 해도 평범한 일상생활을 하던 교도관이다. 결국 사형은 생명 존중 이전에 누가 손에 피를 묻히느냐는 점이 문제가 된다. 피해자(유족)가 하면 복수가 될 것이고, 자원하는 자가 하면 살인이나 마찬가지다.] [[임오화변|아사형(굶겨죽임)]]을 내리면 해결 가능할 것 같은가? 현대 사회에서 쓰기에는 너무나 비인도적인, 길고 고통스러운 방법이다. 그 사람이 죽음에 이를 때까지 최소 2주 이상을 기다리는 동안의 정신적 고통이 다른 사형법에 비해 덜할 것 같은가? 오히려 짧은 시간 만에 죽는 사형법에 비해 더욱 오랫동안 고통받을 수 있다.[* 아사형으로 범인 죽게 될 때 몸부림과 이후 끔찍한 상황을 수습해야 하는 데 그걸 왜? 교도관에게 강요 할 수 있는가와 충돌한다.] 이에 대해 법을 집행하는 사람으로서의 '의무'를 들기도 하지만, 아무리 법적 의무라고 해서 그로 인한 '''[[PTSD|정신적인 후유증]]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형 참관 경험이 있는 사람의 경험담을 들어보면 사형집행장은 눈 앞에서 한 사람이 밧줄에 목이 걸린 채 매달려 죽어가고 있지만 손을 쓸 수 없으며, 모두가 그 사람이 ‘언제 숨이 끊어지나’에만 관심을 가지는 "인간성이 완벽히 상실된 공간"이라고 한다. 실제로 프랑스 혁명 시기 단두대 도입에 반대하던 민중들[* 한번에 끝내면 사형수가 고통을 덜 받는다는게 가장 큰 이유였다.]을 설득한 논리도 여기에서 근거했다. 사형집행인들도 사람인지라 옛날 방식을 고집하면 늘어나는 사형 수요에 의한 스트레스를 감당 못한다는 것. >의무과장이 내려가서 절명하기를 기다렸다. 보통 10분에서 13분이면 숨을 거두는데 여자들은 몸집이 가벼워 '''더 오래간다'''고 했다. 집행 교도관들이 휘장 속에서 하는 말이 밖으로 들렸다. '''한 직원이 ‘갔어?’라고 말하니, 다른 직원은 ‘오래가’라고 답한다. 조금 있다가 ‘가버렸어?’라고 하니, 다른 직원은 ‘아직 멀었어’라고 한다. 모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 >문장식 목사, [[1991년]] [[12월 17일]] 시어머니와 남편 살인교사범[* 남편이 잦은 외도를 하자 이에 앙심을 품고 지인들을 돈으로 매수, 시어머니를 두 번이나 교통사고로 살해하려 하였으나 부상만 입고 생존하여 실패하자 타깃을 바꾸어 남편을 교통사고로 살해했다.] 강영리의 사형 집행 때 있었던 일을 묘사하며.(출처: <아! 죽었구나 아! 살았구나>) >보통 10여분이 지나면 사람의 목숨이 끊어진다. '''[[의사]]의 사명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일 텐데 사형장 입회의사인 의무관은 사형수가 목숨 끊어지기만을 기다리면서, 그 10여 분조차도 지루해 하는 것 같았다.''' >'''죽는 시간만을 확인해야 하니 참으로 못할 짓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 의무관의 입장이나 사형장 입회하고 있는 우리나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았다. >---- >문장식 목사, [[1995년]] [[11월 2일]] [[지존파]] 두목 [[김기환]]의 집행 때 있었던 일을 묘사하며.(같은 책) 교도관들은 참여하고 싶지 않아서 아내의 임신이라든지 부모의 병환, 꿈자리 등을 내세워 서로 미루고, 휴가를 내는 경우도 있었다고. 양심의 가책 때문에 사표를 내거나 정신질환에 시달리기도 하며 ([[http://m.sisain.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786|기사]])심지어 집행 장면이 잊히지 않아 마약에 빠진 사람도 있다고. 국가의 명령에 따라 사형을 집행했을 뿐이라지만, 당사자에게 '''내 손으로 살아있는 사람의 목숨을 끊었다는 자책은 평생을 따라다닌다.'''. 이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일본의 교도관 출신 변호사 노구치 요시쿠니는 자신이 단 한번 사형집행에 참여해봤지만 "아래를 보면서 ‘지금 내가 이 사람을 도와주면 살 수 있을 텐데. 일이지만 내가 누군가를 죽였다’는 느낌이 들던 사실을''' 50년'''이 넘게 지나도 잊지 못한다고 [[https://m.hani.co.kr/arti/society/rights/1087039.html?_fr=gg#cb|증언]]했다. 집행시 사형수의 눈이나 얼굴을 가리는 것도 사실은 __집행자들을 위해서__다. 죽어가는 이가 절명하며 짓는 마지막 눈빛이나 얼굴을 그대로 지켜보는 것보다는 안 보는 것이 당연히 정신적 충격 면에서 낫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사형 집행 때 그 사형판결과 집행을 만들어낸 검사, 판사, 법무부장관이 직접 사형을 집행[* 굳이 이렇게 해야 한다면 검사가 사형을 집행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알맞을 것이다. 형벌을 집행하는 것은 검찰청의 상위 기관인 법무부이며, 형벌과 보안처분의 집행에는 검사가 관여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해야 한다는 주장도 간간히 나오고 있다. 예를 들어 창작물 속이기는 하지만,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 속 스타크 가문의 경우, 사형을 선고하는 자가 그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고 가문의 조항으로 남아있다. 즉, 사형을 판결하고, 집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가 사형수의 목숨을 거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사형 자리에는 집행하는 교도관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검사와 검찰청 서기관, 교도소장, 교도관, 의사, 종교인 등 40여 명이 직·간접적으로 참여한다. 집행에 참여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양심과 무관하게 살인행위에 관여한다는 데서 오는 괴로움이 상당하다고 한다. [[http://m.news.naver.com/read.nhn?sid1=102&oid=022&aid=0003238127&cid=883574|기사]]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라서 사형집행자에 대해서 조명하기도 했다.[[https://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8&aid=0004105633|#]], [[https://www.youtube.com/watch?v=FhxbVFSbPsU|#]] [[종교]]계에서도 비슷한 이유로 사형제를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스도교]], 특히 [[천주교]]가 신학적으로 사형 반대를 강하게 주장하지만[* 사형제에 반대하는 것이 현대 가톨릭의 주류 의견이다. [[낙태]]와 다르게 교리상으로 사형제 찬성을 원천 봉쇄한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 기존의 입장이었지만, 2018년 가톨릭 교리서가 개정되면서 낙태와 마찬가지로 원천 반대라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개신교]]는 분파마다 다르다. 일부 그리스도인은 예수가 사형제의 희생양인 것을 삼아서 사형제에 반대하기도 한다. 특히 개신교 내 진보파는 사형제 폐지 운동에 적극적이다. 물론 사형제는 성경적이라면서 사형제 폐지에 반대하는 개신교 보수파와 [[전통 가톨릭]] 내 목소리도 만만하지 않다. 사형제 폐지에 반대하는 측에서는 사형제 폐지는 '흉악범을 처형하라'는 신법(神法)을 폐지하는 큰 죄악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불교]]에서는 당연히 소중한 인간의 생명을 거두어가는 비인도적 행위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사형제에 반대한다. 이 경우 상당히 철학적인 관점인데,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을 죽일 권리가 과연 있느냐는 것이다. 일부 기독교인은 '사람을 죽이는 것은 신만이 행할 수 있는 고유 권한인데, 감히 인간이 인간을 재단할 수 없다'는 논지로 사형제에 반대하는 경우가 있다. 진보적 신앙관을 가진 사람 뿐만 아니라 보수적 신앙관을 가진 사람 중 일부도 그런 입장을 보인다. >코미카도: 생명은 그 자체에 주어진 권리입니다. 그것을 빼앗는 자는 혹여 국가라고 하더라도 살인자입니다. >다이고: 당신이 사형 폐지론자라니 의외로군. >코미카도: 아뇨, 반대하지 않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살인에는 살인. 훌륭한 제도죠. 그저 사람들 모르게 조용히 처리하는 것이 비열하다고 하는 것뿐입니다. >다이고: 그렇다면 벌건 대낮에 죽이라는 건가? >코미카도: 그렇습니다. 푸른 하늘 아래 시내에 끌고 나온 다음 기둥에 매달아 화형에 처한 후 모두 한 번씩 찌르고 목을 매달아 만세삼창하는 것이 훨씬 더 건전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어리석은 국민들은, 스스로가 살인자가 될 각오 따윈 없습니다. 자신들은 밝은 곳에 있으면서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사회에서 없애주기를 기다립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사형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이 세계가 건전하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죠, 아닙니까? >-<[[리갈하이]]> 9화 中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에는 누가 피를 묻힐 것이냐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이는 사형 집행인의 대한 진정한 물음이다. '죽여라'가 아니라 '너가 죽여라'가 맞는 말이다. 다수가 결국 소수에게 '저 놈을 죽여라.'라고 강요하는 것과 진배없기 때문이고 누군가는 사형수를 죽여야 한다.] 가해자의 천부인권, 신앙심 이전에 우리 누구에게 누구를 죽이라고 강요할 권리가 있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우리의 강요로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사람이 당하는 피해는 어떻게 할지 논의가 필요하다. 가해자를 죽이라고 소리치던 사람들은 결국에는 가해자의 목이 떨어진 후 사라진다. 하지만 그 시체의 뒤처리와 사람을 죽여야 했던 사형 집행인의 고통은 고스란히 그들의 몫이 되어 남는다.[* 하나 예를 들자면 교수형이 집행되는 만큼 가해자가 정말로 죽었는지 확인해야 하고, 교수형을 당하면 탈분을 한다.] 심지어, 자신이 죽인 그 사람이 알고보니 무고한 사람이었다면 더더욱 문제가 커진다. 실제로 사형 집행 경험이 있는 교도관들은 종교에 빠지며 괴로워하거나, 교도관 동료들과 연락을 끊고 잠적해 버리거나, 심지어 집행 사실이 알려져 [[파혼]]을 당하는 등 많은 고통을 겪는다고 한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61341|출처]] 국가적인 일이라고 해서 전쟁과 비교되는 일이 있는데, [[베트남 전쟁]], [[이라크 전쟁]] 등을 보면 병사들의 처지는 비참하기 그지없다. 마치 부속품처럼 버려진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영웅적 행위라고 나오는 2차 대전 참전 병사들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는 다큐멘터리가 나오기도 한다.[* 윤리와 도덕 수준이 높아진 현대에 이르러서야 군인들의 [[PTSD]] 문제가 조명되고 있는데 사형 집행인의 [[PTSD]] 문제는 그런 것도 없다.] 사형 집행인도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망나니]]라는 단어 자체가 사형집행관을 일컫는 의미이다. 만화 [[이노상]]에서 주인공이 외마디 외치는, "왜 우리를 업신여기는 거냐?"는 말처럼. 과연 속칭 대의와 정의를 위해 악인을 처벌하는 사형 집행인이 일반 대중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사형 집행 사실이 밝혀져도 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사회와 동화될 수 있을까? 만약 이를 숨긴다면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왜 사형집행인인 것을 숨겨야 하는가? 이는 모순이다. 결국 사람을 죽인다는 행위 자체를 대다수가 거부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사회 다수가 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짓을 소수에게 시키는 폭력이 될 수 있다. 전쟁은 국위선양과 방어라는 명분이 존재한다. 그래서 오랫동안 전쟁은 무용담과 신화 그리고 현재는 거대 미디어에서 다루어져 왔다. 하지만 사형 집행인은 똑같이 정의를 구현하지만[* 물론 사형을 당하는 사람은, 극소수 억울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쓰레기 중에 쓰레기가 맞을 것이다. 대중을 대신해 이들을 죽이는 것은 확실히 정의실현이라 할 수 있다.] 한번도 그들이 마치 영웅처럼 구현된 적이 없다. 고작해야 공포스런 캐릭터나 천시받는 인물로 그려질 뿐이다. 이것이 군인과 사형 집행인의 극명한 차이다. 결국 사형 집행인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 싶지 않은 본능과 저 놈은 죽여야 한다는 모순된 감정이 충돌할 때 이를 대신 해결해주는 사람들이다. 문제는 그들이 그것을 과연 원하는가, 그리고 우리가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형집행인은 정의를 행함에도 [[망나니|천시되고 멀리하고 싶은 사람들]]로 분류되었다. 사형 집행을 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파혼당한 교도관의 사례가 이를 반증한다. 과연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 대신 피를 묻히라고 강요할 수 있을까? 만약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대신해 정의를 행하는 동시에 스스로 피를 묻히는 그들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몇몇 기록에도 사형 장면을 재미있게 보는 인간은 있어도 이를 집행하는 자들을 차별없이 대했다는 기록은 별로 없다. 단적으로 작위와 봉급까지 받는 [[샤를 앙리 상송]]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알면 좋다. 결국 사형 집행인을 그냥 살인자와 동급으로 본다고 하면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한번 사형 찬성자에게 물어보라, 아무렇지 않게 그들을 받아들일 수 있냐고 확실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게다가 현대에는 과거에 비해 생명 윤리 의식이 높아져서 사람이 아닌 가축을 죽이는 도축조차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형별의 집행이라지만 사람을 죽이는 사형에 조금의 거부감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사형집행인을 전문적으로 뽑고 막대한 돈을 주고 이를 시행하는 방법이 있긴 하다. 다만 이 경우처럼 할지는 의문이다. [[http://www.segye.com/newsView/20151016001202|출처]] 그리고 이는 감정적 오류가 아니라 지키기 위해 죽여야 하는 것은 정당방위이다. 문제는 영원히 가두는 방법이 존재하는 차악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피해자에게 죽이라고 하는 것은 복수라는 혹은 피해자에게 피를 묻히는 폭압과 가깝다.[* 영화 <바람의 검심>에서 켄신이 시시오가 점령한 마을을 해방했는데 시시오 일당에게 형을 잃은 어린 소년에게 복수하라며 칼을 지어주는 어른이 나온다. 어른이 대신 복수해줘도 될 것이나 굳이 어린 소년에게 살인을 강요한다. 이러자 켄신이 나서 이를 막고 이런 행위를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비록 상업 영화지만 피해자 가족에게 복수를 강요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사이코패스를 뽑아 이들에게만 맡기기도 어렵다.[* 오랫동안 사형의 논의가 오가는 것은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살인의 대한 거부감이고 양심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결핍되고 쉽게 살인하고 싶은 자에게 일을 맡긴다는 것은 결국 살인을 방조하는 결과일 뿐이며 만약 이들이 살인에 중독된다면 단순 사형 집행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 즉 이런 모순이 가득한 일을 누군가에게 시키는 것이 사형집행인이고 오랫동안 사형집행인은 천한 신분에 맡긴 이유다. 만약 사형집행인을 지정하고 이들을 뽑는다면 한 가지 알아야 하는 것은 사형이 아니라 이들에 대한 대우다. 즉 사회적 시선으로 소방관, 경찰, 군인을 영웅시하듯 사형집행인을 예전처럼 망나니 취급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매우 힘든 일을 해낸 사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